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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세계개척자

Copion 인터뷰



이 분에 대해 급히 언급하자면 ‘도인’이라 하겠다. 물론 오늘은 백두산에서, 내일은 한라산에서 내공을 쌓는 노인이 아닌 세계 각지로 나다니는 도인을 말한다. 그 내공만큼이나 말씀도 ‘킹왕짱’ 빠르셔서 후에 인터뷰 내용을 다시 해석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따랐지만, 이리저리 정리하며 문득 떠오른 그의 살인미소는 그것마저 웃음 짓게 만들었다. 오랜 기간 푹 삭힌 김치를 가로로 쫙 찢는 미소랄까, 코피온 3기 하재웅 단원의 표정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하재웅 단원을 만난 장소는 종로구에 위치한 KOICA 제1본관의 KOVA(Korea Overseas Volunteers Association, 한국해외봉사단원연합회) 사무실, 현재 그가 간사로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내부적으로 단원들의 회원관리와 함께 사진전, 지역축제와 같은 공익사업을 펼치며 가끔 초·중·고등학교로 강연을 나가기도 한다. “학교에서 ‘문화이해를 위한 국제협력’을 주제로 강연을 하는데 예전보다 관심은 많이 높아진 것 같아요” 그래서 무슨 질문을 많이 받느냐고 물었더니 이러한 일을 하게 된 동기에 관한 것이라는데. 어떤 때는 학생들에게 ‘돈은 안 버세요’라는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는 질문도 있었다며 크게 웃음 지었다.

 

지난 1999년 코피온을 통해 몽골로 해외봉사를 다녀온 하재웅 단원은 “처음엔 그냥 막연히 해외에 나가서 배워보고 싶었고, 미국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하며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코피온을 접하게 됐다고. 굳이 몽골을 1지망으로 쓴 이유에 대해서는 국가보다는 기관을, 해외에는 처음 나가기에 각 기관의

 활동을 중점적으로 살폈다고 한다. 그가 가진 종교적인 성향도 이에 한 몫을 했다. 이처럼 그는 자신과 관련된 상황과 방법을 항시 고려할 만큼 준비에 철저했으며, 훗날 그에게 닥친 선택의 길이 무엇이든 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철저한 성격만큼 하재웅 단원이 해외봉사에 있어서 강조하는 점은 ‘현지화’다. 아마 그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등장했던 단어가 아닐까 싶다. “유목민 생활을 했어요. 일주일에 한번은 그들의 거처에서 자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랬어요” 당시 그는 생존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오해에서 비롯된 문제도 없진 않았다. 이를테면 한국어 강의를 맡았는데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무료로 강의할 수 있겠다 싶지만 돈을 받고 강의하는 것이 좋을지 하는 것이었다. 또한 공산주의 풍토로 인해 현지인들이 강하게 밀치는 방식의 수업을 원하기도 했다. 이야기 하나하나, 현지화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이 묻어 있었다. 
 

유목민 정착 문제와 관련해서는 약간의 논쟁도 오갔다. 정착을 통해 교육이 이뤄지고 장기적인 발전이 만들어지지만 반대로 우리 식의 발전모델을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는 3기 내부에서도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필요를 채워주는 역할이에요. 아이들은 생명을 존중받아야 하는데 수질문제 등으로 죽는 편이 많거든요. 개발논리보다 인권문제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이러한 사업의 일환으로 농업 개발프로젝트 등 농산물의 생산량은 어떻게 늘리고, 어떻게 수확하는지, 어떻게 쉬는 땅을 활용하는지 방법을 알리기도 했다. 가타부타도 필요했지만 현장은 더욱 실질적인 것을 원했다.

 

“ 그리고는 배를 탔어요” 물론 새우잡이 배는 아니다. “몽골에서 돌아오니깐 둘로스(Doulos)호가 한국에 들어온 거예요" 일단 둘로스호에 대해 말하자면 타이타닉호보다 2년 늦게 건조된 배로 현존하는 최고령의 여객선이라고 한다. 하재웅 단원은 ‘떠다니는 민간 UN’이라 불리는 이 배에 우연찮게 탑승해 세계 곳곳으로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갑판에서 돛을 올려라 내려라 부르짖으면서 그는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지를 돌았으며 교육사업과 선교활동을 통해 다문화에 대한 이해를 차츰 확대해 나갔다. “아침에는 흑인들 보고 신기하다, 점심에는 파란 눈을 보고 신기하다, 저녁에는 안으면서 인사하고 그러는 게 신기하잖아요” 5개월 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후 키르기스스탄과 중국 하얼빈에도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그 말에 따르면 현장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이론을 탐구했다고 한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KOVA로 당도했음에도 아직 하재웅 단원에게는 종착지보다 경유지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 같다. 한때 언론인을 꿈꿨던 그였지만 활동으로써 삶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얻을 수 있었고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한 동기 또한 달라질 수 있었다는데. “꿈을 펼칠 수 있는 젊은이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방법적인 측면에서 해외봉사활동을 옵션으로 뒀으면 좋겠고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책상에서의 고민이 아니라 현장에서의 실제적인 행동이 아닐까. 이다음에 그가 향할 곳은 어딘지 사뭇 궁금해진다.